파란 하늘 수놓은 하얀 순록 뿔 雪雪 걸어서 순백의 나라로 국민일보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은 농민들에게 조직과 정신적 공감대를 제공하였고, 결국 농민들은 1894년 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동학의 이름으로 봉기하였다. 이러한 한계를 안고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고 쇄국정책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였다.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양전을 하고, 호포제주48를 시행하여 양반도 군포를 내게 하고,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사창제주49를 실시하여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재정 부족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음에도 노론의 구속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하였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또 그 내부에서 분기하여 나온 정치집단들을 조정하고 통제하면서 정치 주도권을 행사하는 탕평정치를 지향하였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 영조는 더욱 강력하게 붕당을 부정하며, 붕당 관련 주장이 온건한 자들을 등용하였고, 이후 탕평정치가 전개되자 환국은 발생하지 않았다.


크게 보아서는 지배 문화 내지 주류 문화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고 있었으나, 지배 문화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색깔과 특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주목되는 변화였다. 판소리는 18세기 호남 지방에서 발생하였으며 19세기에는 여러 명창주196이 나와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는 판소리 여섯마당을 지어 서민뿐만 아니라 양반층까지 판소리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 동문선』을 편찬하여 신라 이래 조선 초까지의 시문을 정리하였다. 세종은 『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글 창제의 취지를 민족 의식과 애민 정신으로 밝혔다.


경재소가 품관에 의해 운영된 데 비해 경저리는 향리였으므로 신분상 큰 차이가 있었다. 비변사는 상설기구가 된 뒤에도 임시기구 때의 체제를 유지하여, 모든 관직을 다른 관서의 관직자가 겸임하였다. 최고위직인 도제조는 전임 및 현임 의정 전원이 겸임하였으나, 실제는 현직 수상이 비변사 운영을 총괄하였다. 이 밖에 2품 이상의 국방을 잘 아는 재상과 여러 현직 판서가 제조를 겸임하고, 승지가 부제조를 겸임하였으며, 병조 낭관 8인을 비롯하여 다른 관서 낭관이 겸임하는 비변사 낭청 12인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관료제도와 중앙집권체제의 전근대적 역사성은 1876년 개항할 때는 물론이고 그 뒤에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 전근대적 정치를 벗어나기 위한 모색은 부족하기는 하나 실학자주73들이 제시한 바 있고, 19세기 동안 전개된 여러 민중항쟁은 더 뚜렷하게 새로운 수준의 정치제도를 요구하였다. 그 한편 나이 어린 국왕이 즉위하여도 또 폭군으로 군림하다 쫓겨나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도 비교적 원만하게 국정이 운영되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제15대 국왕인 광해군 또한 대다수 신료의 정치적 의사와 반대되는 정치행위를 하였다가 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처럼 신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 국왕을 옹립하면서 그 이름을 ‘왕위를 정당한 계승권자에게 되돌려 준다’는 뜻으로 반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도 조선 정치사의 특성과 깊은 관계가 있다.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논리의 근거는 사회진화론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에게 강자인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등 열강의 의권 침탈이 본격화하였다. 국왕이 외국 공관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이 국가적 수모에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 위기임을 파악한 관료와 지식인들이 자주독립국가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고 독립협회를 세워 운동을 전개하였다. 고종은 환궁주57을 바라는 거국적 염원을 바탕으로 왕권을 회복하고 나아가 권위를 더 높이고자 하였다. 갑오개혁의 추진 배경은 일본에 의해 마련되었으나 개혁의 주체는 온건개화파 계열의 조선 관료였고, 초기의 개혁 내용은 그들이 구상한 것이었다. 이들은 왕실과 정보의 권한을 구분하여 국왕의 자의적 통치행위를 막고, 세습신분제를 폐지하여 능력 본위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지향하였다.


의존성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며, 다른 사람의 충고 없이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성종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윤씨는 하루하루가 괴롭고 힘들었고 결국엔 투서 사건을 꾸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2년 후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망상이나 환청을 경험할 정도로 현실 판단력이 심하게 훼손되기도 한다.


조선은 건국 후 약 7개월 동안 ‘고려(高麗)’를 국호로, 말기의 약 13년 동안은 ‘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사용하였다. ‘고려’를 국호로 사용하였던 때나 ‘대한국’을 국호로 사용하였던 때나 모두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 후손이 국왕이나 황제로 재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옛 국호 고려를 사용한 시기나 새 국호 대한국을 사용한 시기 모두 흔히 ‘조선’이라고 부른다.


이때 봉은사(奉恩寺)를 선종, 봉선사(奉先寺)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고, 승과도 부활시켰으나 문정왕후 사후에 불교는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최제우는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가 천리(天理)를 따르지 않는 난세(亂世)라고 보고, 서학을 경계하면서 전통사상에 바탕을 두고 동학의 교리를 만들었다. 조선 조정은 동학도 사학(邪學)으로 간주, 1864년 대구에서 최제우를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에 의거 사형에 처하였다. 가부장적 가족제도 아래 여자의 지위는 남자보다 낮아서, 사회적 활동은 제한되고, 법률적 행위는 반드시 남편이나 가장의 허락이 있어야 하였다.


붕당 사이의 싸움이 격렬해지자, 사림정치는 사회 모순을 개혁하는 길에서도 멀어져 갔다. 이로써 사림정치는 파탄 국면으로 접어들어, 환국주36정치와 탕평주37정치를 거쳐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성종은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구세력을 견제하며 정치운영방식의 변화를 꾀하였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을 견제하는 카드로써 유용할 뿐 아니라 극동지역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북한이 필요한 존재다. 다만 북한 입장에서 러시아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데 중국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점이 고민일 것이다. 방치된 폐건물 리모델링하여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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